● 발레는 여성의 예술이라는 편견을 깬 천재 발레리노

 

여러분은 ‘발레리노’에 대해서 알고 있나요?

 

‘발레리노’란 발레의 남성 무용수를 말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발레는 여성들 위주의 무용이라고 생각하지만, 현대 발레에서 발레리노들의 중요성은 점점 커져가고 있습니다.

 

한때는 남성 무용수들이 프리마 발레리나를 보조해주는 역할만을 하던 때도 있었지만, 요즈음의 발레에서는 남성 무용수도 자신의 재능을 맘껏 드러낼 수 있게 되었지요.

 

이렇게 고전 발레에서 남성 무용수들이 당당히 자신의 역할을 하고 심지어 발레의 주역까지도 담당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로 니진스키의 영향 때문이었습니다.

 

니진스키는 남성의 몸짓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전 세계에 보여준 최고의 발레리노였지요.

 

특히나 마치 하늘 위로 날아오르듯 자유자재로 펼치던 니진스키의 엘레바시옹(공중으로 날아오르는 기술)은 지금까지도 전설로 남아 있습니다.

 

 

 

 

 

 

니진스키의 어린시절

 

니진스키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발레를 접해왔습니다.

 

니진스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무용수였기 때문에 니진스키는 태어나자마자 무용이 곧 일상이었지요.

 

춤을 사랑했던 니진스키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니진스키에게도 아름다운 발레를 가르쳐주기 시작했습니다.

 

보통 아이들이 자라면서 말과 걸음마를 배우는 것처럼, 니진스키가 춤추는 것을 배우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것이었지요.

 

이러한 부모님의 열정과 더불어 니진스키 자신도 춤추는 일은 곧 즐거움이었습니다.

 

아홉 살이 되던 해 니진스키는 황실 발레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니진스키의 작은 몸에서 나오는 춤은 많은 사람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니진스키는 고작 열두 살이 되었을 때 러시아의 넓은 땅에 자신의 이름을 떨쳤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니진스키의 춤을 보고 싶어 했고 니진스키는 마린스키 극장에 입단한 지 일 년 만에 바로 주역으로서 마린스키 극장의 최고 발레리노가 되었습니다.

 

 

 

 

 

 

 

러시아에서 세계로 뻗어나간 ‘무용의 신’

 

꼬마신동 니진스키가 러시아가 아닌 전 세계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한 것은 천재적인 공연기획가 디아길레프를 만나면서부터였습니다.

 

니진스키는 디아길레프가 이끄는 발레단 ‘발레 뤼스’에 합류해 러시아뿐만 아니라 유럽 등 전 세계 각지에서 무대에 섰습니다.

 

전 세계 관객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습니다.

 

관객들은 무대 위에 서 있는 니진스키의 모습에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니진스키는 마치 천의 얼굴을 가진 무용의 신과도 같았습니다.

 

<세헤라자데>에서의 노예, <지젤>에서의 알 브레히트 공작, <페트루슈카>의 슬픈 꼭두각시 인형 등 니진스키는 어느 역할을 맡든 완벽한 무대를 펼쳐 관객들을 무대에 온전히 빠져들게 했습니다.

 

특히나 니진스키가 <페트루슈카>에서 인형 복장을 하고서 분칠을 한 얼굴로 펼친 무용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발레리나를 사랑한 죄로 죽임을 당하는 인형 페트루슈카의 허무하면서도 슬픈 표정을 니진스키는 완벽하게 재연해냈기 때문이었습니다.

 

 

 

 

고통을 견뎌내고 하늘로 날아오르다

 

이렇듯 천재 발레리노로서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받은 니진스키에게도 어려움은 있었습니다.

 

맏형이 어렸을 때 추락 사고를 당해 정신병원에 수용된 이후로 니진스키의 아버지는 더 이상 가족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마린스키 극장에서 발레 뤼스에 입단하면서도 니진스키는 늘 가족들에게 돈을 보내주어야 한다는 부담에 시달렸습니다.

 

사랑하던 형의 사고, 무책임한 아버지, 가난한 가족들 이 속에서 천재 니진스키는 삶의 슬픔을 알아갔습니다.

 

이러한 슬픔들이 그가 연기하는 배역마다 하나하나 배어들어 관객들은 니진스키의 연기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던 것입니다.

 

니진스키의 무용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니진스키는 마치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고 이야기합니다.

 

니진스키의 엘레바시옹과 발롱(공중에 머물러 있는 듯이 보이는 기술)은 몹시 뛰어나서 관객들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습니다.

 

마치 무대 위에는 어느 젊은 발레리노가 아닌 자유자재로 하늘을 날아오를 수 있는 한 마리 새가 있는 것 같았습니다.

 

아직까지도 사람들은 니진스키가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공중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는지 그 수수께끼를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대를 앞선 발레리노이자 발레 안무가-니진스키

 

니진스키는 뛰어난 발레리노이면서 또한 천재적인 안무가였습니다.

 

그가 안무한 <목신의 오후>, <봄의 제전>은 당시에는 시대를 앞선 충격적인 안무로 관객들의 항의를 받기까지 했지만 오늘날 니진스키의 작품들은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답니다.

 

이렇듯 뛰어난 발레리노이자 안무가인 니진스키. 하지만 니진스키는 스물아홉 살의 젊은 나이에 정신분열증을 일으켜 무대를 떠나고 맙니다.

 

니진스키는 정신병을 일으킨 후에도 무려 30여 년 동안을 더 살고서야 숨을 거두었다고 하는데요.

 

발레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니진스키의 삶은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것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에 니진스키가 정신병을 앓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은 적어도 10여 년은 더 그의 환상적인 발레 연기를 볼 수 있었을 테니까요.

 

니진스키- 그는 발레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전설과 또 아쉬움을 남긴 무대 위의 슬픈 새였습니다.

  

 

 

  


 

 

 

전세계에는 수많은 천재 발레리나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발레리나들을 보면 하늘에서 내려주신 발레리나라고 생각하지요. 

 

하지만 하늘이 내린 발레리나가 있는가 하면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스스로 발레의 길을 찾아간 발레리나도 있습니다. 

 

끝없이 노력하고  노력해서 스스로 천재 발레리나의 길은  사람- 지금부터 엿볼 마곳 폰테인도 바로 그런 발레리나입니다.

 

 

 

* 살에 데뷔한 발레리나

 

"나는    이미 무대에 데뷔했다."

 

여러분은  말이 믿겨지나요? 

 

이것은 마곳 폰테인이 스스로  말이랍니다. 

 

어려서부터 무용학원에 다니면서 일찌기 발레를 시작한 폰테인이지만, 그래도    발레 무대에 데뷔했다니 정말 마곳 폰테인은 하늘이 내린 천재 발레리나 같다는 생각이 들지요? 

 

하지만  말은 정말로 폰테인이    많은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다는 말이 아니랍니다. 

 

폰테인은 걸음마를 종종 거릴 때부터 발레에 관심을 가졌다는 . 그리고  무용학원에 다니면서 발레를 배우던 때에도 이미 무대에 데뷔한 것처럼 긴장하고 열심히 노력했다는  의미하는 것이지요.

 

 영국 발레계의 높은 선생님이었던  발루아 여사는 어린 시절의 마곳 폰테인을 보고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위대성을 타고나지만, 어떤 사람들은 위대성을 획득한다."

 

  말은 우리는 흔히 천재들은 태어날 때부터 천재라고 생각하지만, 마곳 폰테인과 같이 어떤 사람들은 천재성을 스스로 노력하면서 만들어나간다는 말일 것입니다. 

 

 발루아 여사는 마곳 폰테인이 피나는 연습으로 스스로 천재 발레리나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미리 알아본 것이지요. 

 

마곳 폰테인은 이처럼 언제나 발레슈즈의 끈을 동여매며 노력하고  노력하는 연습 벌레였답니다.

 

 

 

 

*우리 시대의  안나 파블로바

 

 마곳 폰테인은 우리 시대의 안나 파블로바로 불리곤 합니다. 

 

그만큼 마곳 폰테인은 발레리나의 전설인 안나 파블로바에 못지 않은 힘을 갖고 있었지요. 

 

그런데 마곳 폰테인은 여섯   벌써 자신이 2 안나 파블로바가 되겠다는 당찬 결심을 하였답니다.

 

어린  폰테인이 무용학원에 다니고 있던 여섯  때의 일입니다. 

 

마곳 폰테인은 어느  어머니와 같이 길을 가다가 벽에서 벽보 하나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런던에서 있을 발레공연을 광고하는 벽보였지요.  벽보 속에는 아름다운 발레리나가   있었습니다.

 

폰테인은 어머니에게 물었습니다.

 

" 발레리나는 누구예요?"

 

어머니는 웃으며 대답해주었습니다.

 

 " 발레리나는 안나 파블로바란다. 안나 파블로바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발레리나지. 많은 사람들이 안나 파블로바의 춤을 사랑하고 있단다."

 

그러자 여섯  꼬마 폰테인은 길가에서 크게 외쳤습니다.

 

 "그러면 나는 안나 파블로바 다음으로 가장 위대한 발레리나가  테야!"

 

 어머니는 그런 폰테인이 귀엽고도 대견스러워 안나 파블로바의 발레 공연에 폰테인을 데려갔습니다. 

 

어머니와 폰테인이 함께  안나 파블로바의 공연은 멋졌습니다. 

 

 공연은 안나 파블로바의 마지막 발레 공연이었지요.

 

 어린 폰테인은 진지하게 안나 파블로바의 춤을 바라보았습니다. 

 

여섯  꼬마는 안나 파블로바의 공연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그건 아무도   없는 일이지만,  십년   꼬마가 정말로  시대의 안나 파블로바가 되어 전세계 발레 팬들을 감동시키게 되었다니 정말 재미있는 일입니다.

 

 

 

 

*눈송이 역을 피나게 연습하는 발레리나

 

 어떤 발레리나든지 처음부터 발레의 주인공을 맡는 일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작은 배역에서부터 시작하여 프리마 발레리나가 되는 것이지요.

 

 하지만 마곳 폰테인의  무대였던 <호두까기 인형>에서 폰테인은 단역이라고  수도 없는 역을 맡았습니다. 

 

바로 눈송이 역이었지요. 

 

사실 눈송이 역은 다른 사람들에게 발레 무대에 선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아주 작은 역할이었습니다. 

 

무대 한구석을 장식하는 정도의 하찮은 배역이었지요.

 

 그렇지만 폰테인은 매일  눈송이 역을 연습하기 시작했습니다. 

 

마곳 폰테인은 휴식 시간에도 쉬지 않았습니다. 

 

 무대  구석에서 눈송이 역을 피나게 연습하는 폰테인의 모습에는 주인공들조차 감탄할 정도였습니다. 

 

폰테인은 아무리 작은 역이라도 무대에 오를 때는  역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러한 연습벌레 마곳 폰테인을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폰테인이 있던 발레단의 단장 선생님인  발루아 여사였습니다.

 

 

 

 

*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지젤'-마곳 폰테인

 

<호두까기 인형> 공연이 끝난   발루아 여사가 어린 폰테인을 불렀습니다. 

 

폰테인은 고개를 숙인  부끄러운 얼굴로  발루아 여사를 찾아갔습니다. 

 

 발루아 여사가 말했습니다.

 

 "폰테인, 다음 작품에서  역할을 결정했다."

 

  폰테인은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폰테인은 다음 작품에서는 단역을 맡을  있게 된다면 몹시 행복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폰테인, 다음 작품에서 너는 지젤 역을 맡도록 한다."

 

  마곳 폰테인은 깜짝 놀랐습니다.

 

 ", 선생님, 저는 지젤을 춤추기엔 너무 어려요. 그리고 저는 발가락도  생기고...얼굴과 목도 길지 못하고...."

 

 하지만  발루아 여사는 무조건 폰테인이 지젤 역을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때부터 폰테인은 혹독한 연습을 시작했습니다. 

 

눈송이 역을 하던 때보다  곱절은 더한 피나는 노력이었습니다. 

 

순간순간 폰테인은 자신은 지젤을 제대로 춤출  없다고 실망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폰테인은 주저앉지 않고 다시 일어나서 춤을 추었습니다.

 

  드디어 공연 당일, 폰테인은 많은 걱정을 했지만, 폰테인의 <지젤>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지젤> 마곳 폰테인을 단숨에 발레 스타로 만들었습니다. 

 

 일곱  어린 나이에 <지젤> 어느 프리마 발레리나가 되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은 폰테인의 춤을 사랑했습니다.

 

 

 

 

*60세의 발레리나

 

<지젤> 이후 폰테인은 <백조의 호수> <잠자는 숲속의 미녀>  여러 작품에 출연했습니다. 

 

그때마다 폰테인의 오데트 공주와 오로라 공주는 저마다 색다른 모습으로 무대에 올라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폰테인의 춤을 칭찬했지만 폰테인은  한번도 발레 연습을 그친 적이 없었습니다.

 

 폰테인은 60세가 넘어서도 계속해서 무대에 올랐습니다. 

 

세상에, 할머니가 발레 무대에 오르다니, 그런 이상한 일이  있다고 느껴지나요? 

 

하지만 놀랍게도 60세의 발레리나는  누가 보아도 아름답고 완벽했습니다. 

 

영원한 지젤이자 오데트 공주, 오로라 공주였던 마곳 폰테인. 혹시 60세의 늙음도 폰테인의 아름다움에 놀라 폰테인을 비켜갔던 것은 아닐까요?

...

 

 

 

 

  


 

 

 

 

 

*발레리나도 없이 공연된 어느 발레 무대*

 

1931 1 25일의 일입니다. 

 

이날 영국 런던에서는 감동적인 발레 무대가 펼쳐졌습니다. 관객들은 모두 무대 위를 바라보고 있었고, 극장에는 생상스의 "동물의 사육제"중에서 '백조'가 천천히 흘러나오고 있었지요. 

 

하지만 무대 위에는 그 누구도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발레리나도 없는 캄캄한 무대에는 한 줄기 조명만이 비치고 있었습니다. 

 

마치 무대에 올라있는 발레리나를 비춰주는 것처럼 조명은 이리저리 움직이며 무대를 비추었지요.

 

 하지만 관객들은 아무도 일어서지 않았답니다. 

 

관객들은 텅 빈 무대와 조명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관객들은 생상스의 음악에 맞춰 원래 이 무대에서 춤을 추었어야 할 안나 파블로바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공연이 있기 이틀 전 그러니까 1913 1 23, 갑자기 세상을 떠난 전설의 발레리나 안나 파블로바- 관객들은 안나 파블로바의 그 아름답고도 우아한 몸짓을 가만히 추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안나 파블로바의 어린시절*

 

 이렇게 안나 파블로바는 살아 있을 때에도 또 죽은 후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발레리나였습니다. 

 

그러면 위대한 발레리나가 되기까지 안나 파블로바의 어린시절은 어떠했을까요.

 

 안나 파블로바는 1881 2 12일 러시아의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안나는 어렸을 때부터 몹시 허약했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안나가 얼마 자라지 못하고 죽을 거라며 '쯧쯧'하고 혀를 차곤 했지요.

 

 안나의 어머니는 가난한 세탁부였기 때문에 안나를 제대로 간호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나의 어머니는 외할머니댁에 안나를 맡기기로 하였습니다. 

 

시골의 외할머니집에서라면 안나가 몸도 튼튼해지고 편히 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시골집에 있는 동안 안나는 정말로 조금씩 조금씩 건강한 꼬마 아가씨로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안나의 어머니는 그런 안나가 대견하고 기특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안나의 어머니는 명절이면 언제나 안나에게 깜짝 놀랄 만한 선물을 해주었습니다.

 

 안나가 여덟 살이 되던 해 크리스맛에도 안나의 어머니는 커다란 선물을 해주었지요. 

 

하지만 이 선물이 안나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놓으리라는 것은 아무도 알지 못했습니다.

 

 

 

 

*<잠자는 숲속의 미녀>의 오로라 공주가 되기로 결심한 안나*

 

 안나의 어머니는 여덟 살 소녀 안나에게 멋진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린스키 극장에서 발레 공연 <잠자는 숲속의 미녀>를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그날 처음으로 발레 공연을 본 안나는 한없이 마음이 설렜습니다. 

 

무대 위를 나비처럼 날아다니던 오로라 공주 역의 발레리나가 자꾸만 눈에 선했습니다.

 

 얼마 후 드디어 안나는 결심했습니다.

 

 '나도 발레리나가 되어서 저 마린스키 극장의 무대에 오르고 말겠어. 저 무대에서 가장 아름다운 오로라 공주가 되어야지.'

 

 여덟 살 소녀 안나 파블로바는 이때부터 발레리나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반대하는 어머니를 끈질기게 설득해서 드디어 황실 발레 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안나 파블로바는 그렇게 천천히 오로라 공주가 되어 무대에 서겠다는 꿈을 이뤄가고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알아본 천재 발레리나*

 

황실 발레 학교를 졸업한 후 안나 파블로바는 그토록 꿈꾸던 마린스키 극장의 시어터 스쿨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1900년 즈음 안나 파블로바가 무대에 막 데뷔했을 때 다른 동료들과 관객들은 모두 안나 파블로바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아 보았습니다.

 

 길고 균형잡힌 팔과 목선, 날씬한 다리와 발목, 어쩐지 슬픔을 간직한 듯한 얼굴 뿐만 아니라 파블로바의 우아한 몸짓은 모든 사람을 감탄하게 만들었습니다. 

 

마치 보이지 않는 날개가 달린 것처럼 무대를 가볍게 가로지르는 안나 파블로바의 춤은 사람들을 극장으로 모여들게 했습니다.

 

 당시에 안나 파블로바가 무대에 등장하기만 해도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일이지요? 

 

사람들은 그만큼 안나 파블로바의 춤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2분만에 사람들을 울린 명작 '빈사의 백조'*

 

 어느 날이었습니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안나 파블로바가 미하일 포킨이라는 유명한 발레 안무가를 찾아갔습니다. 

 

안나 파블로바는 자신을 위한 발레 작품을 안무해달라고 포킨에게 부탁하였습니다. 

 

때마침 포킨은 생상스의 '백조'를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포킨은 안나 파블로바의 연약한 듯하면서도 고상한 모습을 보고는 안나에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백조입니다. 그러니까 이 음악에 맞춰서 마음대로 춤을 추어 보세요."

 

 안나 파블로바는 집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날개짓을 하다 숨을 거두는 백조의 모습을 춤추었습니다. 

 

포킨은 파블로바를 따라다니며 팔을 꺾어주거나 포즈를 조절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그 유명한 '빈사의 백조'라는 작품입니다.

 

 '빈사의 백조' 2분밖에 안 되는 짧은 작품입니다. 

 

하지만 안나 파블로바는 이 작품으로 온 세계에 이름을 떨쳤습니다. 

 

세상에서 마지막 날개짓을 하는 백조-그 슬픈 몸짓을 안나는 완벽하게 춤추었던 것입니다. 

 

이 작품을 본 사람들은 모두 안나 파블로바를 '백조의 여신'이라고 여겼다고 합니다. 

 

음악이 흐르면 무대 위에는  안나 파블로바는 사라지고 어느덧 아름답고 순수한 백조 한 마리만이 날개짓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전세계 발레를 알린 백조의 여신*

 

안나 파블로바는 15년 동안 배를 타고 전 세계에 공연을 하러 다녔습니다. 

 

안나 파블로바가 공연하느라 돌아다닌 거리만 해도 56 Km라고 하니 놀라운 일이지요? 

 

파블로바는 유럽, 미국, 일본, 아프리카 등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4천회의 발레 공연을 펼쳤습니다.

 

 발레를 온 세계에 전파하는데 가장 노력한 백조의 여신 안나 파블로바- 그래서 오늘날에도 많은 발레 팬들은 안나 파블로바의 아름다운 춤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딴따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딴따라’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는 사람, 또 여러 가지 공연을 하는 사람들을 옛날 사람들이 얕잡아 부르는 말이었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하는 사람들을 천하게 여기는 나쁜 관습이 있었지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무용 역시 서양에 비해서 크게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에 한 여성 무용가가 한국춤을 무대에 올려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이 무용가의 춤은 우리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서양 사람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졌지요.

 

중국의 매란방, 인도의 우데이샨카와 함께 동양의 3대 무용가로 손꼽히는 이 여성 무용가- 바로 최승희입니다.

 

 

 

가난에 굴하지 않는 어린 우등생 최승희

 

최승희는 1911년 11월 24일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최준현 씨와 어머니 박성녀 씨 사이의 사 남매 중 귀여운 막내딸이었던 최승희는 어렸을 때부터 똘똘한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호기심이 많고 당찬 최승희는 학교 성적도 늘 우수했지요.

 

최승희가 현재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소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또래들보다 성적이 훨씬 뛰어났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은 6년 만에 졸업하는 소학교를 4년 만에 졸업하기도 했습니다.

 

소학교를 졸업한 후 최승희는 숙명 여자 고등 보통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즈음에 최승희의 집안 형편은 몹시 좋지 않았습니다.

 

어린 승희는 계속해서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가난한 집안이 걱정되었습니다.

 

게다가 당시엔 여자는 소학교를 마치면 공부를 그만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었지요.

 

하지만 그럴수록 최승희는 더욱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숙명 여자 고등보통학교에 다니는 동안 최승희는 계속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무용과의 첫만남

 

숙명 여자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최승희는 음악을 더 공부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동경음악학교와 서울사범학교에 지원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서 불합격하고 말았습니다.

 

음악공부를 더 하고 싶어했던 최승희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 즈음 최승희의 큰오빠 최승일은 승희에게 새로운 소식을 하나 알려주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무용가 이시이바꾸가 서울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최승희는 어지러운 마음도 달랠 겸 큰오빠와 함께 서울에서 이시이바꾸의 공연을 보기로 하였습니다.

 

이시이바꾸의 무용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무용은 그저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것 정도로만 알고 있던 최승희에게 이시이바꾸는 무용이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 것인지를 알려 주었습니다.

 

이시이바꾸의 무용을 보는 동안 최승희는 자신도 이시이바꾸의 제자가 되어 무용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음악학교에 진학하지 못해 고민하던 최승희에게 무용은 그렇게 새로운 희망이 되고 있었습니다.

 

 

“딴따라는 안 돼!” 부모님의 반대를 이겨내고 무용가의 길로 들어서

 

이시이바꾸의 공연을 본 후 최승희는 큰오빠의 주선으로 이시이바꾸를 직접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시이바꾸는 최승희가 무용을 열심히 배우겠다고 마음만 먹는다면 일본으로 데려가서 제자로 삼겠다고 말했습니다.

 

최승희는 날아갈 듯이 기뻤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최승희가 무용을 배우러 일본에 가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아니, 할 짓이 없어서 딴따라를 하겠다는 거냐? 절대로 안된다!”

 

부모님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마저도 무용을 배우겠다는 최승희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너는 공부도 잘 하는데 왜 춤을 추려고 하니. 춤꾼은 사회에서 아무도 대접해주지 않는단다.

 

춤 따위는 생각하지 말고 어서 꾸준히 공부나 하렴.”

 

무용가가 되려는 최승희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최승희는 마냥 무용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최승희는 고집을 꺾지 않고 부모님을 설득했습니다.

 

결국 승희는 일본에서 무용뿐만 아니라 성악이나 재봉 같은 것도 배운다고 부모님을 설득하여 어렵게 허락을 받아 내고야 말았습니다.

 

이제 최승희는 무용가의 길에 한 걸음을 내딛은 것입니다.

 

 

 

조선의 꽃, 최승희

 

이시이바꾸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최승희는 오로지 무용에만 신경을 쏟았습니다.

 

최승희의 무용실력은 나날이 늘어갔습니다.

 

그래서 최승희는 무용을 배우기 시작한 지 1년 반 만에 이시이바꾸의 두 번째 조선공연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1927년 10월 26일과 27일에 열린 이 공연에서 최승희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각 신문과 잡지에서는 최승희의 아름다운 무용을 크게 보도했습니다.

 

그래서 최승희는 28일에 앵콜 공연까지 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조선의 꽃 최승희’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최승희는 잇따른 공연 속에서도 늘 자신의 무용을 직접 안무하였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최승희의 인기는 계속 높아갔지만, 최승희는 고민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 민족의 정서를 춤에 담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우리나라의 춤을 무대에 올릴까?’

 

서양무용으로만 무대를 꾸며도 최승희의 무용은 늘 인기 있었지만 최승희는 우리나라의 춤을 추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최승희는 그때부터 기생과 광대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최승희는 광대들이 추는 탈춤을 보고 <가면무>를 창작해서 무대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기생들이 추던 고전무용을 직접 보고는 <아리랑><부채춤>과 같은 무용을 만들었습니다.

 

또 최승희는 농촌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농부들의 몸짓을 연구하여 <풍년이 오면>, <농악무>와 같은 작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서민들 사이에 묻혀 있던 우리나라의 춤이 최승희의 무용으로 무대에 올라오게 된 것입니다.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

 

최승희는 1937년부터 3년간 미국,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페루, 칠레, 콜롬비아, 멕시코 등 14개국에서 150여회의 공연을 했습니다.

 

최승희의 무대를 본 세계인들은 우리나라 무용의 아름다움에 감탄했습니다.

 

<에헤라 노아라>,<보살춤>,<초립동> 등은 세계인들이 열광한 최승희의 무용이었습니다.

 

최승희는 오늘날까지도 동양의 전설적인 무용가로 세계 무용사에 남아 있습니다.

 

만약 최승희가 무용가를 ‘딴따라’로 여기던 옛날의 관습을 이겨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그랬다면 우리는 최승희의 전설적은 무용을 전세계인들과 함께 나눌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발을 가진 발레리나?

 

여러분은 혹시 우리나라에게 가장 아름다운 몸과 가장 못생긴 발을 동시에 갖고 있는 사람을 알고 있나요?

 

아니, 몸은 아름다운데 발은 가장 생겼다니, 혹시 인어공주처럼 무슨 슬픈 사연을 간직한 동화 속의 인물이냐구요?

 

아닙니다.

 

천사와 같은 몸짓으로 세계인들에게 감동을 주는 발레리나 강수진. 바로 강수진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못생긴 발을 가졌다고 한다면 여러분은 믿겨지나요?

 

사람들은 분홍빛 토슈즈 안에 감춰진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을 보면 모두 깜짝 놀란다고 합니다.

 

강수진의 발에는 여기저기 혹이 나고 발톱이 갈라지고 피멍이 들고 곪아. 있기 때문이지요.

 

발의 상처들은 강수진이 한국의 어린 발레 지망생에서 세계 최고의 프리마돈나(최고무용수)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연습을 했는지를 보여줍니다.

 

 

 

 

발레와의 첫만남

 

지금은 세계 5 발레단 하나인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프리마돈나이지만 강수진 역시 발레를 하는 어린 학생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원래 어린 수진은 리틀엔젤스 단원으로 한국무용을 전공하고 있었답니다.

 

그러다가 한국무용으로 선화예술중학교에 들어갔지만, 학교에서 수진은 발레반에 들어가면서 발레와 첫만남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수진이 발레에 열심이었던 아니랍니다.

 

처음에 수진은 발레 수업이 지루하기만 했습니다. 몸도 힘들고 지루하기만 발레수업에 수진은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발레 수업을 하시는 선생님을 도망 다니거나 수업시간에 졸기가 일쑤였답니다.

 

지금은 세계 최고의 발레리나이지만 수진 역시 어릴 때부터 발레의 천재였던 것은 아니었던 거지요.

 

이런 수진을 발레의 길로 인도하게 것은 선화예중에 발레 선생님이 오신 다음부터였습니다.

 

수진은 친절하고 아름다운 새 선생님이 무대에서 발레를 하시는 모습을 보고는 크게 감명을 받았습니다.

 

수진의 맘속엔 새 선생님께 보여야겠다는 생각과 더불어 선생님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발레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싹텄습니다.

 

그때부터 수진은 발레 연습을 하느라 하루를 보내곤 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아름다운 동작을 만들기해서 수진은 고민하고 고민했습니다.

 

온종일 발레에만 빠져 있다보니 수진은 먹는 , 잠자는 것까지 잊어버릴 지경이었지요.

 

이러는 동안 수진의 발레 실력은 쑥쑥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모나코에서의 힘겨운 유학생활을 견디고...연습, 또 연습

 

그러던 어느 수진이 다니던 선화예술중학교에 조그만 사건이 있었습니다.

 

수진이 중학교 3학년이던 모나코라는 나라의 왕립 발레학교 교장선생님이 선화예술중학교를 방문한 것이지요.

 

모나코에서 왕립 발레학교 교장선생님이 한국에까지 것은 발레 유학생을 선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자리에서 수진은 누구보다도 돋보이는 실력으로 모나코 왕립 발레학교의 교장선생님의 눈에 띄었습니다.

 

그리고 수진은 드디어 발레의 본고장 모나코로 발레 유학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모나코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습니다.

 

부모님도 계시지 않고, 말도 통하지 않는 모나코에서 꿋꿋하게 발레 공부를 한다는 것은 힘든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수진은 포기하지 않고 세계적인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 연습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른 친구들이 잠들면 수진은 혼자 연습실로 돌아가 어두운 연습실에서 밤새 발레연습을 했습니다.

 

 

 

 

● 드디어 프리마돈나로 무대에 선 연습벌레

 

수진이 견뎌낸 연습의 결과는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습니다.

 

1985 세계적으로 유명한 발레 콩쿨인 스위스 로잔 발레 콩쿨에서 수진은 동양인으로서는 최초로 1위로 입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발레는 서양의 무용인만큼 동양인들은 발레를 없다는 사람들의 생각을 완벽하게 깨뜨린 사건이었지요.

 

하지만 검은 머리의 발레리나- 강수진은 또다시 금발의 서양인들을 놀라게 합니다.

 

세계적인 발레단인 독일의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 강수진은 스물 살의 나이에 당당하게 들어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수진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의 역사상 최연소 발레리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7년 동안 수진은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아주 작은 배역만을 맡아야 했습니다.

 

유럽 최고의 발레리나들이 모여 있다는 슈투트가르트 발레단에서 한국인인 수진의 자리는 없는 같았습니다.

 

하지만 수진은 그럴 때도 묵묵히 연습만 뿐이었습니다.

 

수많은 토슈즈가 부러지고어졌습니다. 수진의 발에는 염증이 생기고 혹이 생기고 상처가 났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수진은 토슈즈를 들고 연습실로 들어갔습니다.

 

수진은 오직 연습만이 모든 말해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연습 끝에 드디어 수진이 1993 로미오와 줄리엣의 프리마돈나로 무대에 섰을 , 사람들은 수진에게 아낌없는 박수와 찬사를 보내주었습니다.

 

 

 

 

세계 속의 강수진

 

강수진은 지금도 한국인 발레리나로서 세계 발레의 역사를 끊임없이 다시 쓰고 있습니다.

 

각종 발레 단체는 강수진을 세계 최고의 발레리나로 손꼽는데 조금도 망설이지 않습니다.

 

심지어 독일에서는 '강수진 거리'까지 만들어 강수진을 응원하고 사랑하고 있지요.

 

하지만 강수진이 이렇게 세계 최고의 발레리나가 되기까지는 언제나 묵묵히 연습, 연습만을 했던 강수진의 뒷모습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강수진이 신다가 낡아버린 토슈즈만 해도 수천 켤레가 된다고 하니 정말 놀라운 일이지요.

 

버려진 수천 켤레의 토슈즈 속에서 강수진의 발은 계속해서 곪고 상처를 입었습니다.

 

마치 도깨비 방망이처럼 여기저기 혹투성이가 되어버린 발이지만, 강수진은 오늘도 발에 토슈즈의 끈을 묶습니다.

 

어쩌면 토슈즈 안에 감춰진 강수진의 발은 세상에서 가장 못생긴 발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이 아닐까요?

 

발이 견뎌낸 아픔과 고통으로 강수진은 지금 세계 최고의 발레리나가 되어 무대에 오르고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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