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딴따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나요?

 

‘딴따라’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하거나 춤을 추는 사람, 또 여러 가지 공연을 하는 사람들을 옛날 사람들이 얕잡아 부르는 말이었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서는 이렇게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하는 사람들을 천하게 여기는 나쁜 관습이 있었지요.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무용 역시 서양에 비해서 크게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에 한 여성 무용가가 한국춤을 무대에 올려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킵니다.

 

이 무용가의 춤은 우리나라 사람들뿐만 아니라 서양 사람들에게까지 널리 알려졌지요.

 

중국의 매란방, 인도의 우데이샨카와 함께 동양의 3대 무용가로 손꼽히는 이 여성 무용가- 바로 최승희입니다.

 

 

 

가난에 굴하지 않는 어린 우등생 최승희

 

최승희는 1911년 11월 24일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최준현 씨와 어머니 박성녀 씨 사이의 사 남매 중 귀여운 막내딸이었던 최승희는 어렸을 때부터 똘똘한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호기심이 많고 당찬 최승희는 학교 성적도 늘 우수했지요.

 

최승희가 현재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소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또래들보다 성적이 훨씬 뛰어났기 때문에 다른 친구들은 6년 만에 졸업하는 소학교를 4년 만에 졸업하기도 했습니다.

 

소학교를 졸업한 후 최승희는 숙명 여자 고등 보통학교에 입학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즈음에 최승희의 집안 형편은 몹시 좋지 않았습니다.

 

어린 승희는 계속해서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가난한 집안이 걱정되었습니다.

 

게다가 당시엔 여자는 소학교를 마치면 공부를 그만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이었지요.

 

하지만 그럴수록 최승희는 더욱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래서 숙명 여자 고등보통학교에 다니는 동안 최승희는 계속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무용과의 첫만남

 

숙명 여자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최승희는 음악을 더 공부하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일본의 동경음악학교와 서울사범학교에 지원했지만 나이가 너무 어려서 불합격하고 말았습니다.

 

음악공부를 더 하고 싶어했던 최승희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었습니다.

 

그 즈음 최승희의 큰오빠 최승일은 승희에게 새로운 소식을 하나 알려주었습니다.

 

일본의 유명한 무용가 이시이바꾸가 서울에서 공연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최승희는 어지러운 마음도 달랠 겸 큰오빠와 함께 서울에서 이시이바꾸의 공연을 보기로 하였습니다.

 

이시이바꾸의 무용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무용은 그저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드는 것 정도로만 알고 있던 최승희에게 이시이바꾸는 무용이 얼마나 아름답고 위대한 것인지를 알려 주었습니다.

 

이시이바꾸의 무용을 보는 동안 최승희는 자신도 이시이바꾸의 제자가 되어 무용을 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음악학교에 진학하지 못해 고민하던 최승희에게 무용은 그렇게 새로운 희망이 되고 있었습니다.

 

 

“딴따라는 안 돼!” 부모님의 반대를 이겨내고 무용가의 길로 들어서

 

이시이바꾸의 공연을 본 후 최승희는 큰오빠의 주선으로 이시이바꾸를 직접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시이바꾸는 최승희가 무용을 열심히 배우겠다고 마음만 먹는다면 일본으로 데려가서 제자로 삼겠다고 말했습니다.

 

최승희는 날아갈 듯이 기뻤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최승희가 무용을 배우러 일본에 가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아니, 할 짓이 없어서 딴따라를 하겠다는 거냐? 절대로 안된다!”

 

부모님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학교 선생님들마저도 무용을 배우겠다는 최승희의 생각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너는 공부도 잘 하는데 왜 춤을 추려고 하니. 춤꾼은 사회에서 아무도 대접해주지 않는단다.

 

춤 따위는 생각하지 말고 어서 꾸준히 공부나 하렴.”

 

무용가가 되려는 최승희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최승희는 마냥 무용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최승희는 고집을 꺾지 않고 부모님을 설득했습니다.

 

결국 승희는 일본에서 무용뿐만 아니라 성악이나 재봉 같은 것도 배운다고 부모님을 설득하여 어렵게 허락을 받아 내고야 말았습니다.

 

이제 최승희는 무용가의 길에 한 걸음을 내딛은 것입니다.

 

 

 

조선의 꽃, 최승희

 

이시이바꾸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최승희는 오로지 무용에만 신경을 쏟았습니다.

 

최승희의 무용실력은 나날이 늘어갔습니다.

 

그래서 최승희는 무용을 배우기 시작한 지 1년 반 만에 이시이바꾸의 두 번째 조선공연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1927년 10월 26일과 27일에 열린 이 공연에서 최승희는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각 신문과 잡지에서는 최승희의 아름다운 무용을 크게 보도했습니다.

 

그래서 최승희는 28일에 앵콜 공연까지 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조선의 꽃 최승희’로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최승희는 잇따른 공연 속에서도 늘 자신의 무용을 직접 안무하였습니다.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최승희의 인기는 계속 높아갔지만, 최승희는 고민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우리 민족의 정서를 춤에 담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우리나라의 춤을 무대에 올릴까?’

 

서양무용으로만 무대를 꾸며도 최승희의 무용은 늘 인기 있었지만 최승희는 우리나라의 춤을 추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최승희는 그때부터 기생과 광대들을 찾아다녔습니다.

 

최승희는 광대들이 추는 탈춤을 보고 <가면무>를 창작해서 무대에 올렸습니다.

 

그리고 기생들이 추던 고전무용을 직접 보고는 <아리랑><부채춤>과 같은 무용을 만들었습니다.

 

또 최승희는 농촌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농부들의 몸짓을 연구하여 <풍년이 오면>, <농악무>와 같은 작품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서민들 사이에 묻혀 있던 우리나라의 춤이 최승희의 무용으로 무대에 올라오게 된 것입니다.

 

 

 

세계적인 무용가 최승희

 

최승희는 1937년부터 3년간 미국,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이탈리아, 독일, 네덜란드, 우루과이, 아르헨티나, 페루, 칠레, 콜롬비아, 멕시코 등 14개국에서 150여회의 공연을 했습니다.

 

최승희의 무대를 본 세계인들은 우리나라 무용의 아름다움에 감탄했습니다.

 

<에헤라 노아라>,<보살춤>,<초립동> 등은 세계인들이 열광한 최승희의 무용이었습니다.

 

최승희는 오늘날까지도 동양의 전설적인 무용가로 세계 무용사에 남아 있습니다.

 

만약 최승희가 무용가를 ‘딴따라’로 여기던 옛날의 관습을 이겨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그랬다면 우리는 최승희의 전설적은 무용을 전세계인들과 함께 나눌 수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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